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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한슬
에디터 한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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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14
탈시설: 당신 곁에 살 권리

'인간 농장'에서 20년을 살았다

"왜 장애인에게만 집단생활을 강요하나요?"

장애
탈시설

에디터의 말

중증뇌성마비장애인인 한규선씨는 온 얼굴을 써서 아주 천천히 말합니다. 더러 얼굴에 경련이 와서 단어를 말하는 데 시간이 걸리거나, 말을 더듬거나,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입모양을 보면서 귀를 기울이는 법,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요령을 익히면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요. 우리는 자유와 억압에 대해서, 집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한규선씨는 향유의집(구 석암베데스다요양원)에서 20년 간 살았습니다. 2006년, 한규선씨는 TV에서 장애수당이 올랐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장애수당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보건복지부 홈페이지에 시설 운영자의 장애수당 횡령 의혹을 올렸어요. 1년 뒤, 서울시 감사 결과 운영자의 횡령 비리가 밝혀졌습니다.

한규선씨는 2008년 향유의집에서 가장 처음으로 탈시설했습니다. 11년 전부터 김포시에 있는 국민임대주택에서 살고 있는데요. 한규선씨를 자택에서 만났습니다.


시설에 몇 년도에 들어갔나요?

88년도예요.

그 때 혹시 연세가?

20대였어요.

2008년에 나오셨으니 20년 간 계셨네요.

네.

어떤 방이었는지 기억나세요?

본관 2층에 들어가자마자 왼쪽 세 번째 방이에요.

여기가 그 방 사진이에요. 예전 지내셨던 방을 보시면 어떤 감정이 드나요?

한규선 씨가 향유의집 사진을 보며 자신의 방이 어디였는지 알려주고 있다.
한규선 씨가 향유의집 사진을 보며 자신의 방이 어디였는지 알려주고 있다.

좀 감정이 묘해요. 어쨌든 제가 20년 동안 온몸 다해 생활했던 곳이니까요.

이제 나왔으니 진짜 잘 된 일이죠. 어느 정도는 내 자신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향유의집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뭐라고 할까... 좋았던 기억보다는 나빴던 기억이 더 많아요. 상처도 많이 받았어요.

시설에 처음 들어갔을 때, '뭐 이런 데가 있나.' 생각했어요. 나이가 저보다 어린 직원들이 전부 반말을 하고, 누워있는 사람은 사람으로 대접도 못 받고. ‘여기서는 내가 내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사람 대접을 못 받겠구나.’ 그 생각이 딱 들었어요.

물론 시설도 사람 사는 데니까 좋았던 기억도 있지만, 좋았던 기억보다는 안 좋았던 기억이 더 많아요.

가장 상처 받았던 기억이 있다면?

당시에 입소비를 내고 들어간 사람도 있고, 내지 않고 들어간 사람도 있었는데요. 저는 후자였어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돈을 내고 들어 온 사람과 나 같은 사람은 대우에서 차이가 나죠. 들어가서 얼마 안 돼서 휠체어를 타게 됐는데, 돈 내고 들어 온 사람은 휠체어를 타고 돈 안 내고 온 사람은 기어 다니라고 하니까. 그 때 상처 받았죠.

아무튼 이런 저런 일이 많았어요.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같이 생활하잖아요.

제가 제일 참기 힘들었던 건, 20년 째인데 생활이 나아지기는 커녕 점점 더 나빠졌다는 점이에요. 그래서 내부고발을 결심한 거죠.

어떤 게 점점 나빠졌나요?

그 때 설립자가 우리들의 생활보다는 돈에 더 관심이 많았으니까. 정부에서 나오는 지원금의 20%도 우리한테 안 쓰였고요. 음식만 해도 형편없이 나왔어요. 과연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우리도 사람인데... 2006년, 2007년 그 때가 가장 나빴어요.

근데요. 지금 시설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 때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시설이었어요. 그래도 그 안에서 인권침해는 일어났고요. 비리도 일어났어요.

시설에서 인권이 지켜질 순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시설 자체가 인권침해가 안 일어날 수 없는 그런 구조거든요.

일단 방 하나에 많게는 8명, 적게는 3명 이상 공동으로 생활하고요. 같은 형제끼리도 방을 같이 쓰면 사생활을 지킬 수가 없는 건데, 남남이 한 방을 같이 쓰다 보니까, 말 잘하는 생활인들한테 언제나 짓눌려 살아야 되는 거죠. 생활지원교사들이 일대일로 지원을 하는 게 아니고, 방 하나를 맡아서 지원을 해야 되니까 더 그랬어요.

그리고 생활지원교사들도 자격이 안 되는 분들이 많았어요. 말 안 듣는다고 목욕탕에 집어 넣어 놓고, 밥 안 주고, 그런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니까요.

시설에서 지낼 때는 평상시 일상이 어땠나요? 주로 무엇을 했나요?

처음에는 운동을 많이 했어요. 어쨌든 내가 움직여야 되겠다는 생각에. 영어도 좀 공부해 본다고 중학교 1학년 영어책 복사해서 봤고요. 컴퓨터도 좀 혼자서 공부해 봤고요.

공부를 되게 좋아했네요.

그 때는 학교를 전혀 못 갔거든요. 막연히 뭐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실 그 때는 그렇게 해도 아무 의미 없다고도 생각했지만. 어차피 죽어야 나가는 곳이 시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시설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거죠. 시설이라는 데가 꿈이 없는 곳이잖아요.

실제로 시설에서 사망한 분도 많다고 들었어요.

네. 1년에 많게는 10명, 평균적으로도 한두명씩은 돌아가셨으니까. 마음이 아프죠. 같이 생활하시는 분들이 돌아가시는 거. 근데 그것도 여러 번 반복되다 보니까 무뎌졌어요.

2007년 탈시설 투쟁할 당시, 매체 인터뷰에서 “사람은 사육당하는 동물이 아니다”라고 하셨어요.

저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시설은 ‘인간농장’이라고 생각해요. 시설의 이익을 위해서 농장에서 가축을 사육하는 것처럼 장애인들을 사육하는 거죠. 사람 수대로 지원금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 생각에는 변함 없어요.

왜 장애인들을 그렇게 한 곳에 몰아 가둬야 되는지.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집단 생활을 강요 받는 건 옳지 않아요. 장애인들도 지역사회에서 사는 게 옳은 거라고 생각해요.

만약에 PD님은 아무 이유 없이 집단생활을 하라고 하면 하시겠냐고요.

안 하고 싶겠죠, 당연히.

그러니까요. 비장애인들이 자기 문제가 아니니까 ‘장애인은 시설에서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장애가 있다는 건 집단생활을 강요 받을 이유는 아니라고 봐요.

한규선씨가 시설에 입소한 것도 강요였나요?

자의 반, 타의 반이죠. 제가 집에 있을 수 없는 형편이었던지라. 그 때는 시설 밖에는 대안이 없었으니까요. 지금 같은 대안이 있었다면 시설에는 안 갔겠죠.

2008년에 시설을 나온 뒤, 처음에는 광진 장애인자립센터 체험홈에 있었어요. 2010년 5월에 지금 이 집으로 이사왔어요.

처음 요양원을 나올 때, 집에 알리지 않았어요. 2년 반 동안 우리 집에서는 내가 요양원에 있는 줄 알았죠. 어차피 반대하고, 걱정할 거니까 일부러 말씀을 안 드렸어요. 가족들은 내가 나와서 살면 부담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엄마한테 말 안하고 저지른 거죠, 뭐.

언제 말씀 드렸어요?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1년 됐을 때였나.

그 후에는 가족분들 좀 놀러 왔어요?

네. 어머니가 여기 와 보고, 이렇게 해 놓고 사는 거 보더니 너무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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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게 좋은 거 같아요. 집에 사람을 초대할 수 있고.

네. 좋죠.

시설은 그런 게 없으니까.

전혀 못하죠. 옛날 시설에서는 아는 사람들이 오는 걸 안 좋아했어요. 1989년에 제가 우연치 않게 뇌성마비 복지회 사람을 알게 돼서, 그 사람들이 시설에 날 보러 온다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오지 못하게 막은 적도 있어요. 그 때만 해도 제가 들어간 지 얼마 안 돼서 아무 소리 못 했어요.

시설에서 오래 사셨는데, 그곳을 집이라고 여기시나요?

저는 거기 집이었다고 생각 안 해요. 20년 동안 항상 긴장을 하고 있었거든요.

집에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고, 편히 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시설은 아니잖아요.

이 집에 와서 제일 좋은 것도 마음이 편하다는 거. 하하하. 누구 눈치 안 봐도 되고요. 비록 처음 나왔을 때는 제가 활동지원을 한 달에 130시간 밖에 못 받았으니까 몸이 좀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했어요.

* 장애인 활동지원 서비스: 지방자치단체에서 장애 정도에 따라 활동보조인을 고용할 수 있는 시급에 해당하는 바우처를 일정량 지급하면, 이를 통해 고용된 활동보조인들이 집을 방문해 가사, 이동, 사회생활 등을 돕는 복지제도.

지금 이 집은 한규선씨에게 어떤 곳인가요?

안식처. 그냥 내가 쉴 수 있는 곳. 하하하. 온전히 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 워낙에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해요. 그래서 집에서 영화 같은 걸 보는 게 취미거든요. 편안한 곳이죠. 아무한테도 간섭 안 받고. 내가 20년 동안 꿈꾸었던 그런 곳이에요.

사실 팬데믹 이후에 사람들이 집에서 더 시간을 많이 보내기도 하잖아요. 집의 의미가 각별해진 시대인 것 같아요.

코로나에도 가장 취약한 게 집단 생활이잖아요. 엄청 위험하죠. 이런 감염병 때문에라도 시설은 없어져야 돼요.

지금도 시설에 사는 장애인분들께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용기를 가지고 나와도 돼요. 그리고 가족분들도 반대만 하지 마시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요. 제가 이렇게 혼자 살아도 가족들한테 아쉬운 소리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나와서 어떻게 살지?’ 너무 이 생각만 하실 게 아니에요. 시설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 수도 있거든요. 시설만을 고집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시설을 나오려면 본인도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봐요.

네. 제가 요양원에서 제일 먼저 나왔는데, 그 때만 해도 다들 나와서 어떻게 사냐고 했어요. 근데 나오면 다 돼요.

저는 요양원에서 나올 때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왔어요. '요양원에서 20년 살았는데, 어디서든 못 살겠냐.'

처음에는 저도 많이 고민했죠. 당장 있을 곳은 있었지만, 시설 밖에 나와서 생활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결심을 하고 나오니까 결과가 좋잖아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있나요?

하고 싶은 말이요. (잠시 생각) 지금 탈시설지원법이 국회에서 논의 되고 있는데, 빨리 제정이 됐으면 좋겠어요.

물론 반대하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장애인들의 인권을 생각할 때는 그 법이 꼭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법적인 근거가 있으면 좀 더 많은 장애인들이 탈시설 할 수 있을 거라고 보거든요.

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적응을 못할 거라고 염려하시는데, 그건 영 부당하다고 생각해요. 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 수 있거든요. 중증장애인들도 이제는 지역사회에서 같이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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