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제람은 군대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끊임없는 폭력과 가혹행위를 맞닥뜨렸다. 군대는 그를 보호하기는 커녕, 아웃팅하고, 군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가두고, 발달장애를 연기해야 전역시켜 주겠다고 강요했다. 그렇다면 군대를 나온 뒤에 이 이야기는 끝일까?
그렇지 않았다. 제람은 거기서 이야기를 끝내지 않았다. 군대를 떠난 뒤, 자신이 숨 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찾았고, 한 발 더 나아가 스스로 안전한 공간을 만들었다. ❮You come in, I come out❯이라는 전시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시각예술이라는 언어로 표현했다. 이 전시는 제람이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을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그것을 들어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었다.
제람이 군대를 나와 안전한 공간을 찾을 수 있기까지, 안전한 공간을 스스로 만들기까지의 이야기를 읽어 보자.
우리나라에도 수많은 성소수자가 있잖아요. 모두가 다 다른 경험들을 했을 거예요. 하나로 납작하게 볼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해요.
특히 자신의 다름, 자신의 고유한 성적 지향에 대해서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이야기할 때. 받아들여졌는지, 유보했는지, 받아들여가는 중인지, 아니면 거절 상태인지 여러가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저와 어머니는 특수한 상황이었던 거죠. 제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어머니에게 알려짐과 동시에 제가 너무 위험한 상황이었던 거예요. 어머니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그러니까 씹지도 못한 상태에서 삼키는 상태가 됐던 거죠.
그러니까 너무 고통으로서 받아들였던 거예요. 저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시선도, 물론 저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너무 고통스럽고.
그날 이후로 진짜 몇 년간 군대에서의 이야기들을 말을 못 했어요. 가족에게도.
서로 되게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야기할 수 없었거든요.
또 군대를 나온 이후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 제가 되게 감수성이 짙어진 거예요. 군대 문화가 가지고 있는 좋지 않은 모습들이 사회에 되게 만연해있는데, 그것에 대해서 좀 둔감한 사람도 있지만 저는 굉장히 민감해진 거죠.
살려고 군대 밖으로 나왔는데 온 세상이 군대 같더라고요.
뭐 군대에서 쓰던 그런 용어들, 그 말투들, 사람을 대할 때 상명하복 하는 거. 그게 약간 부드러워진 느낌이긴 하지만 여전히 그런 거죠. 아무리 카페라떼에 우유가 들어간다고 카페인은 그대로 있잖아요. 옅어질지언정. 심지어 군대는 2년 만에 끝날 수도 있다고 치지만 이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제 안에서 공황 증상이 불 일듯 일어났어요. 차곡차곡 심해졌어요. 너무 괴로웠어요.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전에는 한국에서는 경영학을 전공했거든요. 부지런히 공부해서, 사람들이 박수 치는 학교에서. 사회에서 너무 잘 유통되고 쓰이는 언어를 배우는 거잖아요. 자본의 언어를 배우고, 잘 적응하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준비를 했는데.
이미 어긋남이 시작된 거예요. 대기업은 가서 뭐해. 지원은 가능할까? 공직에는 지원할 수 있을까. 어머니가 저한테 그러셨어요. 날아보기도 전에 날개가 꺾인 것 같다고.
근데 오히려 거기에서 저는 새로운 실마리를 얻었어요. 돌파구라고 해야 될까.
정말 나만의 언어, 나를 설명하고 나를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언어를 배우고 싶었고, 더 많이 갈고 닦고 싶었어요. 그게 저한테는 시각 예술이었어요.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가 생겼고, 어머니께서 도와주셔서, 영국에서 예술을 공부할 수 있게 됐죠.
유학 오기 얼마 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거든요. 그러니까 엄마의 엄마가. 제가 할머니에게 너무 사랑받고 자랐어가지고 마지막 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 할머니 곁을 지켰어요. 그런데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자기가 4.3 생존자라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되게 놀랐어요. 왜냐하면 우리 집에선 4.3 얘기를 별로 안 했거든요. 그래서 제주 사람들 모두의 고통이고 아픔의 역사지만, 우리 집은 너무 다행히 빗겨갔나보다 했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어느 날 많은 사람들과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서, 군 경찰이 총을 난사했다는 거예요. 할머니도 쓰러지셨대요. 몇 시간 뒤에 깨 보니까 같이 온 사람들이 다 죽고 할머니만 살았더래요. 할머니를 향하던 총알이 빗나간 거죠. 그렇게 목숨을 건지신 거예요. 할머니가 주위를 둘러보니까 해가 뉘엿뉘엿 지더래요. 그래서 부지런히 집으로 돌아와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어린이들 밥을 해먹였대요. 그리고 할머니의 침묵의 역사는 시작된 거예요. 70여 년간. 할머니도 심각한 국가 폭력을 경험했지만 그걸 말하기 너무 어려웠던 거죠. 말하면 빨갱이로 몰잖아요. 혹시 우리 아이들한테 해가 되진 않을까. 뭐 이런 여러 가지 염려가 많으셨겠죠.
할머니는 왜 그 시점에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해석은 제 몫으로 남았어요. 저는 일종의 유언으로 받아들였어요. 제 안에서 어떻게 해석했냐면.
"나는 살면서 내가 너무 아팠던 얘기 못하고 살았는데, 너는 안 그랬으면 좋겠어."
그래서 어떻게 하면 시각 예술을 가지고서 집단 트라우마나 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다룰 수 있을지에 대해서 석사 논문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 때 처음으로 진짜 공부를 하게 된 것 같아요. 예전에 경영학과까지 입학하기까지는 수능 잘 봐야 되니까 막 엄청 기계적으로 공부하잖아요. 무언가 사회에 능력 있는 사람으로 승인받기 위한, 증명을 위한 공부였을 수도 있고.
영국에 가서 처음으로 할머니의 삶이 어머니를 경유해서 나로 이어지는, 그 이야기가 내게 주는 울림, 어떻게 하면 그걸로 내 인식과 내 감각을 확장시킬 수 있을지 공부하게 된 거예요. 이미 다른 사람들은 어떤 작업과 노력으로 그런 활동과 시도들과 실천들을 해왔는지 보면서.
나도 나의 이야기를 한 번 해보면 좋겠다. 작업으로.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났거든요. 그런데 용기를 내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제가 심하게 공황 증상을 느꼈다고 했잖아요. 영국에 가서 2주가 채 안 됐는데 매일같이 겪던 공황 증세가 사라진 거예요. 늘 안개 속에서 뿌옇게 내 의식을 싸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두터운 것들이 해소되면서 햇빛이 쫙 비치는 느낌이 들었어요.
결정적인 계기가 뭐였냐면요. 저는 계속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이고 싶거든요. 이것도 나에게 너무나 중요한 정체성인데. 내가 가진 성적 지향 때문에 양립할 수 없다고, 너무 많은 고통과 상처들을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있었거든요.
영국 국교가 성공회잖아요. 그것도 개신교 중 하나예요. 신부님을 만나서 둘이 하이드파크에 갔어요. 햇빛이 엄청 비치는 날이었는데. 저의 이야기를 쭉 들으시더니 그러는 거예요. "너무 잘 오셨어요. 교회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교회에 갔더니 신부님도 게이, 주교님도 게이, 학교에 가니까 선생님도 게이. 너무 자연스럽게 있어요. 나를 숨 막히게 하는 공기가 아니라 숨 쉬게 해주는 그런 공기로서. 뭔가 개운해지면서 공황 증상이 수그러들었어요.
그 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정신적인 질병을 너무 개인의 문제로 몰아가는데, 그게 아니라 굉장히 사회적인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공동체가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거였구나.'
한편으로는 쾌적함, 회복감, 자유를 만끽할수록 한국에서 고통받고 있을 누군가에 대한 죄책감도 컸어요.
영국에 2016년 하반기에 갔는데, 2017년 봄에 한국 군대에서 성소수자 색출 사건이 있었거든요. 군형법 92조 6항을 근거로 벌어진 일이에요.
군대는 이 조항에 따라 동성애자 군인을 색출하고, 기소하고, 처벌해왔다. 군 부대 밖에서든, 군인이 되기 전이든, 상대가 군인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개인의 성생활을 파헤쳐 '범죄 증거'로 삼았다.
한국에서 성소수자들이 쓰는 잭디라는 앱이 있어요. 그 앱이 깔려 있는 군인의 핸드폰을 포렌식 해갖고, 그 정보들을 가지고서는 굴비 엮듯이 막 엮어가지고, 색출해서, 처벌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거예요. 그 사이 저는 조금 한숨 돌리고, 힘을 얻었잖아요.
내가 막 엄청 단단하고, 강하고, 단호하고, 멋지고, 힘 있는 사람이 아닐지언정 내가 조금 충전한 이 힘으로라도 작은 목소리를 내서 함께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용기를 좀 얻어가지고 이제 나의 이야기를 작업으로 한번 표현해 봐야겠다.
학교 수업 시간에 작품 계획을 발표했어요. 앞쪽에 우리나라로 치면 교수들이라고 할 수 있는 튜터들이 앉아 있고, 뒤에는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앉아 있었어요.
근데 튜터 중에 한 사람이 저의 이야기를 쭉 듣더니 "이미 영국에선 다 지나간 얘긴데 누가 신경이나 쓰겠냐." 그렇게 얘기했어요.
저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영국하고 한국의 시차가 있지 않냐. 난 지금 8시간 시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영국에선 다 지나간 얘기일 수 있지만, 한국에서 지금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영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의 시차로 살아가고 있다.
왜 한국에서 얘기하지 못하고 여기 왔냐고? 여기서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여기서 느꼈던 안전한 감각들을 나누고 싶어서, 여기에서 작업하고 전시하려고 하는 거다. 아무도 신경 안 써도 난 하겠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시차를 사니까."
동료 친구 중에 한 명이 딱 손을 들더라고요. 맨체스터에서 온 윌이라는 친구였는데.
"제람 너 틀렸어."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또 무슨 소리 하려고 그래. 나 가만히 좀 놔두지' 이랬는데. "I care. 내가 너 신경 쓸게." 그러자 또 옆에 있던 친구들이. "나도." "'나도." "나도." "나도." "나도."
그때 그 환희라고 말하기보다는 안도. 그 감정을 지금도 기억해요. 그 후에 친구들이 쪽지에다가 적어요. "너 혹시 영어 도움 필요하면 얘기해."
그렇게 저의 이야기를 잘 정리하고 준비해서 작업으로 전달해 본 거예요. 제목도 친구들이랑 같이 정했어요. <You come in, I come out.> 당신이 들어오면, 내가 커밍아웃 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이 안전 때문에 밝히지 못했던 성적 지향과 말하지 못했던 것들을 내보일 수 있다.
총 4면으로 되어 있는 유리병풍을 만들었어요. 거울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는 안이 들여다 보이지 않아요. 특히 강한 빛을 쏘면 쏠수록 더 그래요.
그런데 안에 '들어오면' 글자들이 보여요. 제가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이 한국어와 영어로 적혀 있고, 글자 사이사이로 밖이 다 보여요.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들어왔기' 했기 때문에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그 이야기 사이에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다시 밖을 볼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때 알았어요. 정말 당신이 들어오지 않으면 나는 커밍아웃을 할 수 없다는 구조를.
왜냐면 런던 학교에도 한국 사람이 있더라고요. 또 도망가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구글에 막 검색해 봤어요. '한국 사람 없는 곳.' 제가 어디를 가겠어요. 뭐 적도 근처의 기니를 가도 한국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디까지 도망갈 거야? 더 이상 도망갈 곳은 없잖아요.
그렇다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안전한 공간을 좀 만들고 넓혀가는 실천을 시작해야겠다. 그것이 아주 작은 한 평짜리의 작업일지언정.
역시나 그 작업도 많은 친구들이 "내가 신경 쓸게(I care)"라고 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딱 하루 3시간짜리 전시를 위해서 두 달 동안 뚝딱뚝딱 만들고, 아크릴을 끼우고, 바퀴를 달고. 그 3시간 동안 많은 분들이 전시에 왔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인데 저한테 다가와서 안아주고.
"너무 귀한 작업이다." "너무 소중한 이야기 고맙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겠다."
군대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폭력, 감금, 처벌을 경험한 사람은 제람 뿐 만이 아니다. 2021년, 제람은 자신을 포함해 6명의 증언으로 ❮You come in, We come out - Letters from asylum(당신이 들어오면 우리가 나섭니다 - 망명지에서 온 편지들)❯이라는 전시를 서울과 제주에서 연다.
1998년, 2008년, 2016년, 2017년, 2021년까지. 개인의 이야기가 연결되고, 역사가 된다. 더 알고 싶다면 3편을 읽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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