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불편하다고 느끼는 일을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컨대 식당에 찾아가 "음식이 아니라 폭력입니다"라고 외치는 사람들,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며 한 기업의 빌딩에 수성 페인트를 붓는 사람들, 녹지가 더 필요하다며 사유지에 꽃을 막 심는 사람들, 양육비 미지급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사람들...
정의롭게 여길 시선도 있지만, 이런 행위 중 일부는 현행법상 불법이다. 따라서 이런 행동을 한 사람들 중 일부는 기소되어 재판을 받기도 한다. 그들은 왜 '저렇게까지' 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이 사람들에겐 두려움이 없는 걸까? 의문스럽기도 하지만 걱정스럽기도 하다. 이 사람들, 과연 안전할까?
닷페이스는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 묻기로 했다. "왜 저렇게까지 해?" 이 질문이 곧 이 시리즈의 제목이다. '폭풍 비난'을 감수하면서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과격하게 싸우는 사람들을 만나 그렇게 하는 이유를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첫 번째로 만난 극단적인 사람은 '직접행동 DxE(Direct Action Everywhere)'의 은영 활동가다. DxE는 동물 해방 운동을 하는 단체로, 활동의 일환으로 우리가 밥을 먹고 쇼핑을 하는 공공장소에 찾아가 큰 목소리로 외친다. "이건 동물에 대한 폭력입니다!" 이래도 괜찮은 걸까. 그런데 이 용기는 어떤 확신에서 나오는 것일까.
직접행동(direct action)이란 개인이나 집단이 제도에 반하여 정치 ・ 경제 ・ 사회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는 단호한 행동을 말한다. 폭력 형태로, 비폭력 형태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대표적인 비폭력 직접행동은 마하트마 간디가 주도한 인도 독립 운동이다.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이 갑자기 큰 목소리로 구호를 외쳤다. "모든 동물이 자유로울 때까지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는다! 사랑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새로운 세상이 여기서 열린다!" 2021년 12월 6일 월요일, 여의도의 한 백화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날벼락 같은 집단행동에 쇼핑하던 사람들이 멈춰섰고, 무전기를 든 경호원 그룹이 바빠졌다. "사진 찍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해석하기 복잡한 상황이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집단행동과 경호원의 준엄한 경고 가운데 무엇이 더 폭력적이고 위협적인 것일까. 하지만 어느 쪽에서도 물리적인 폭력은 없었고, 그런 일이 벌어질 만한 시간도 없었다. 시위도 진압도 딱 3분 만에 끝났다.
이것은 '직접행동 DxE'(이하 DxE)가 하는 전형적인 기습 시위다. 그들은 식당, 마트, 백화점, 정육점, 동물원 같은 공공장소에 우르르 몰려가 동물에 대한 폭력을 멈추라고 말한다. 목소리는 크지만 현장에 머무는 시간은 짧다. 객부터 점주와 관리인 모두가 맞닥뜨린 당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자리를 뜬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그들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Q. DxE의 기습 시위는 동물 폭력에 대한 저항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그 시위를 공공장소에서 힘차게 한다. 음식점을 운영하거나 밥 먹으러 온 사람들이라면 폭력이라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은영: 첫 시위를 마치고 촬영한 영상이 화제가 돼서 일본 TV 프로그램까지 진출했다. 그때 생각했다. '아, 이거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우리가 하는 시위의 영향력을 절감한 것이다.
이런 시위를 '방해 시위'(disruption)라고 한다. 사회 운동에서 널리 통용되는 개념이다. 일상 구석구석에 깃든 폭력을 고발하는 효과적인 의사 표현이고, 폭력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하자는 연대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다.
그런 시위가 폭력일까? 그런데 폭력이 뭘까?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갑자기 소란을 맞닥뜨리는 것? 우리는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가 주저하는 것을 한다. 그리고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한다. 동물에 대한 폭력을 멈추자고 큰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폭력에 맹렬히 저항하는 것이다.
Q. DxE가 고발하는 동물에 대한 폭력이란 무엇일까.
은영: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비질(vigil)'이다. 농장이나 수산 시장, 도살장에 찾아가 죽음을 앞둔 동물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활동을 말한다. 진실을 마주하고, 진실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처음 비질을 하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오물로 뒤덮인 숱한 동물을 봤다. 신발이 피로 흥건해졌다. 펑펑 울었고, 한 달쯤 밥이 안 넘어갔다. 선량한 일반 시민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그걸 다 집어삼키고, 기업은 또 아무 데나 다 넣어버리고 있구나 싶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과격할까? 우리가 마주한 것이 더 과격하다.
도살장 근처에서 나는 비명 소리(사실 방음 시설이 너무 잘 되어 있어서 안 들리는 경우가 더 많다), 피와 오물로 얼룩진 바닥. 그런 건 도시에서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본 것을 도시에 그대로 옮겨놓을 수는 없으니까 몸과 목소리로 전달하는 것이다.
Q. 결국 우리 밥상 위에 올라오는 것은 동물의 시체라고 말하고 싶은 걸까?
은영: 나는 그것도 감상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우리가 먹는 건 그냥 시체가 아니라 학대당한 시체다. 납치되어 감금되고 강간당하고 착유된 시체다.
우리는 시체 너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체가 되기 전에 모든 동물에겐 고유성과 개별성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Q. 그런데 이런 시위를 음식점이 아니라 광장에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DxE가 드나드는 공공장소는 이 시위가 개인의 쉴 권리, 영업할 자유를 침해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 곳이다.
은영: 집회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허용되는 범위가 좀 좁다. 정해놓은 광장에서 하라고 한다. 그런 광장에 가도 동물권은 후순위 의제다. 그래서 우리는 식당과 마트, 백화점 같은 일상적인 공간으로 간다. 폭력이 있는 곳 어디에나 간다고 보면 된다.
짧은 시간에 적절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게끔 연습도 많이 한다. 때와 장소도 가린다. 현장마다 성격이 다르고 시위 참여자들의 안전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그때 계획을 추가하고 뺀다.
사실 어디서 하는가보다 중요한 건 어떻게 하는가다. 우리가 하는 건 시민 불복종 비폭력 시위로, 수십 년 전의 시위와 다르지 않다. 낡은 질문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어떻게 여성이 투표해?' '어떻게 흑인이 백인이랑 같이 버스를 타?'
그땐 참정권을 얻기 위해 여성이 거리에 나오고, 흑인이 버스에 타는 게 말도 안 되게 과격한 시대였다. 그게 과격한가? 우리가 하는 것도 똑같다.
시민 불복종이란 법이나 제도, 기업의 운영 방식 등이 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이를 공개적으로 거부하는 행위를 말한다.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고 경찰에 체포되는 것을 목표로 할 때도 있다.
Q. 이 일련의 활동으로 '도덕적 우월감 과시'라는 비난도 따라올 수 있다. 이런 비난에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은영: 되물으면 된다. 비도덕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더 이상하지 않을까? 고작 음식, 고작 우리의 입맛 때문에 어떤 존재의 삶을 모조리 파괴하는 게 마땅할까? 혐오와 폭력에 우리가 얼마나 무감한지를 돌아보는 게 먼저라고 생각한다.
DxE는 시위 말고도 할 일이 많고 해온 일도 많다. 그중 하나는 축사에 찾아가 학대당하는 동물을 '공개구조'하는 것이다. 사법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그 동물은 농장주의 사유 재산이다. 그러나 이 행위를 절도라고 보는 관점을 DxE는 전면 부정한다.
DxE가 공개구조한 돼지는 총 세 마리다. 그 가운데 새벽이라는 돼지는 자신만의 공간을 얻었다. 이곳을 생추어리(sanctuary)라고 부른다. 착취 환경에서 구조된 동물을 위한 안식처를 뜻한다. 운영은 다른 곳에서 하는데, 감당해야 할 것이 만만치 않아 보인다. 현재 새벽이가 사는 생추어리는 약 100평, 한 달 치 식대는 약 100만 원이다.
새벽이 같은 축산 동물 공개구조는 DxE가 하는 직접행동의 핵심이다. 이걸로 책도 썼다. <훔친 돼지만이 살아남았다>(2021)다. 책의 제목 또한 이 직접행동의 양면성을 반영하고 있다. 한 존재의 생존과 한 재산에 대한 침해가 충돌하는 것이다.
Q. DxE는 새벽이를 구조했다. 농장주 입장에서는 재산을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법적으로 무단 침입 ・ 절도 ・ 업무 방해 등에 해당하는 일인데, 범죄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시작했을까?
은영: 우린 '돼지 서리단'이라고 불렸다. '서리'라고 불리는 행동을 하기 전부터 스톨(축사)을 오래 살폈다. 말도 못 하게 비위생적이고 좁은 곳에 아픈 동물이 여럿이 산다. 버티라고 항생제를 놓지만 이미 죽어 있는 동물도 꽤 많다. 성장이 더디고 질병이 있어서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죽이기도 한다. 우리가 구조한 새벽이는 몇백 원, 혹은 몇천 원짜리였다. 몸이 약해 곧 폐기 처분될 돼지였으니까.
다가올 일을 모르지 않았다. 알기 때문에 했다. 사람들이 절도라고 부를 테니까 재판까지 갈 수 있다는 걸 예상하고, 그 너머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새벽이는 우리가 구조하지 않았다면 죽었을 것이다. 아무도 새벽이를 몰랐고, 그 죽음도 몰랐을 것이다. 우린 새벽이를 구해냈고 살려냈다. 생명을 구하는 걸 절도라고 볼 수 있을까?
Q. 몇천 원짜리 돼지를 '공개구조'하는 '돼지 서리단'이 되기 전까지, DxE 구성원은 평범한 윤리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여기서 오는 괴리는 없었을까?
은영: 동물권에 눈을 뜨고 활동하면서 법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 우리는 동물 구조 활동을 범법 행위로 만드는 사회와 싸운다. 법정은 동물권 문제를 알리고 사회를 향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기회의 공간이다.
또 다른 시민 불복종도 기획했다. 2019년 한 도계장(고기를 얻기 위해 닭을 죽이는 곳)을 봉쇄했다. 닭의 죽음을 막기 위해 활동가 여럿이서 도살장 입구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누웠다. 연행과 재판을 준비하고 한 일이다. 영업 방해로 벌금 1,200만 원이 선고됐다. 항소 이후 이 사건은 대법원으로 갔다. 이것은 업무 방해가 아니라 시민 불복종이라는 우리의 상고를 심리 중이다.
법과 싸움이 예정된 일, 법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이런 일을 무작정 할 수는 없다. 사전에 변호사와 소통했고 지금도 논의 중이다. '이것을 일반적인 영업 방해로 볼 수 있는가?' '누가 피해자인가?' '우리가 이 시위를 통해 전달한 정보는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바탕으로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구조에서 은폐되는 동물 학살을 막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비폭력 시위뿐이라는 것을.
Q. 법으로 싸운다면 결국 승자와 패자가 생긴다. 지면 벌금을 무는 것을 넘어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 여기서 오는 두려움은 없을까?
은영: 내가 동물 공개구조로 최초로 감옥에 가게 되는 미래를 자주 상상한다. 내가 감옥에 간다면 지금보다 큰 주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새벽이 같은 동물이 학대당하지 않는 세상을 성큼 앞당길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국에선 염소 구조로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 주마다 다르겠지만, 미국에서 자동차에 오래 방치된 개를 발견하고 차 유리를 깨서 구조했다면 이를 범죄로 여기지 않는다. 농장에 감금되어 있던 염소도 똑같은 논리로 개인이 구조한 거다. 그런데 그 염소가 개고양이 같은 반려 동물이 아니라 축산 동물이라는 이유로 그걸 도둑질이라고 말하는 게 올바를까?
전 세계 어디서든 법은 부정의와 싸우는 활동가를 감옥에 넣는 것을 두려워한다. 부당한 현실에 이목이 쏠리는 걸 그리 원하지 않는데, 이 재판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사건이 커지는 순간을 늘 기다려왔다.
미국 DxE 활동가 웨인 슝(Wayne Hsiung)의 이야기다. 2018년 '염소 사건'으로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체포되었고, 2021년 12월 7일 주 배심원단의 평결을 통해 무단 침입, 절도 등의 행위로 유죄가 선고됐다. 6~17개월의 집행 유예, 24개월 보호 관찰, 훔친 염소에 대한 배상금 250달러 지불 명령을 받았다.
Q. 그렇게 구조한 새벽이는 지금 생추어리(구조된 동물을 위한 안식처)에 있다. 거기에 있는 게 과연 해방일까?
은영: 생추어리는 동물 해방의 공간이 아니라 동물 해방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국 땅에서 동물이 '동물답게' 살 수 있는 야생 환경을 찾기는 대단히 어렵다. 구조된 동물은 인간한테 기대어 살아야 한다. 당연히 인간에게는 돌봄 노동이 따라온다.
우리 사회에 진정한 동물 농장을 위해 쓰는 돈과 땅이 있을까? 우리가 생추어리를 통해 진짜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관계다. 인간에게 '가축'이란 병들면 언제든 죽이고 땅에 묻거나 태울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된다(사실 우리는 가축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반면 생추어리에선 새벽이가 어디 아프지 않은지, 기분이 어떤지를 인간이 살핀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것이다. 반려동물과 인간이 맺는 일반적인 관계와 다르지 않다.
Q. 새벽이가 구조된 축사에는 죽음을 앞둔 돼지 몇 천 마리가 더 있다. 그렇게나 많은 동물이 존재하는데, 새벽이 한 마리를 구조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한 마리 구조했다고 세상이 달라지진 않는다'고 냉소할 때, 어떻게 대응할까?
은영: 우리가 구조한 돼지 한 명을 큰 경제적 손실이라고 말했다가, 또 겨우 돼지 한 명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한다. 모순 아닐까?
새벽이한텐 입맛이 있다. 나름의 호불호가 있어서 고구마보다 감자를 더 좋아한다. 새벽이가 아프거나 감정에 문제가 있을 때면 진짜 답이 없다. 검색을 해봐도 나오는 정보가 없다. 돼지의 상태를 그동안 누가 궁금해했을까. 우리가 구조한 한 명의 돼지가 이 정보를 만들고 있다. 수천 수억 돼지 가운데 새벽이만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새벽이와 맺는 관계는 특별하지만, 그러나 새벽이가 특별한 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반려 돼지로서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로 논의가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 '새벽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럼 저기 있는 돼지들은?' '새벽이는 어디서 왔을까?' '그 땅이 어땠는지 알아?' 새벽이는 이 질문의 물꼬다.
'명'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을 세는 단위'다(표준대국어사전). 이름을 뜻하는 한자어(名)에서 나온 표현으로, 일반적으로 사람의 수를 셀 때 쓴다. 은영 활동가는 '명'이라는 단어가 목숨(命)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본다. 또한 동물을 셀 때 일반적으로 쓰는 표현인 '마리'가 동물을 도구화하는 단어라고 여긴다. 그래서 동물을 셀 때 '마리' 대신 '명'이라는 표현을 의식적으로 사용한다.
은영에 따르면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동물권 논의는 "인간이 인정하는 동물, 그러니까 개와 고양이처럼 인간에게 대상화된 동물"에만 집중해왔다. 축산 동물의 삶을 바꿀 만한 만족스러운 제도는 아직 없어서 DxE는 바쁘다. 비질을 하고, 책을 내고, 다양한 시위를 기획한다. 그런데 그 일은 때때로 좀 위험해 보인다.
DxE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 은영을 비롯한 활동가가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을 기록하는 곳이면서, DxE가 하는 활동이 다 민폐고 범죄라는 비난이 쏟아지는 현장이다. 인상적인 '악플'을 묻자 은영은 너무 많아 기억할 수 없다면서 오히려 이걸 기회로 사용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 "악플이 하나의 시민 반응으로 인정되더라고요. 도가 지나친 폭력을 통해 오히려 동물의 현실을 깨닫고 각성하는 사람이 생기거든요."
그들은 얼굴뿐 아니라 몸도 드러낸다. 지난해 2월에는 동물의 강제 착유에 저항하기 위해 광화문 한복판에서 상의 탈의 시위를 했다. 얼마나 추웠을까. 배포될 사진이 걱정스럽지는 않았을까. 이 사람들, 정말 괜찮은 걸까.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나 단단하게 만든 것일까.
Q. DxE 활동가 대부분이 얼굴을 드러내고 활동한다. 신체를 드러내기도 한다. 여성 활동가가 많은데, 걱정할 게 많지 않을까.
은영: 공장식 축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설문 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97.2%가 개선이 필요하다고 그랬다.
간단한 문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아는데, 겁이 가로막고 있다.
비질이든 시위든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의 손을 가끔 볼 때가 있다. 벌벌 떨면서 무섭다고 말하던 어린 여성이 단풍같이 작은 손으로 현수막을 들었다가 나중에는 상의 탈의까지 한다. 메시지가 오해되고 왜곡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하고, 또 할 거라고 말한다. 동물의 끔찍한 현실을 먼저 본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Q. 지금 DxE가 하는 일은 혼자 하기 어렵다. 모이면 힘이 된다는 걸 어떻게 실감할까?
은영: 함께한다는 게 가장 중요하다. 여럿이 있어야 용기가 생기고 상상력을 얻는다. 우린 늘 이렇게 말한다. '한 명만이라도 더 만나면 다른 세상이 돼.'
말 그대로 사람이 더 붙으면 할 수 있는 일의 지평이 무한대가 된다. 한두 명이 도살장에 들어가 돼지를 구하면 침입이 되고 절도가 된다. 몇십 명이 가면 운동이 된다. 나는 종종 이런 꿈을 꾼다.
천 명이 장미꽃을 들고 천천히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순간을. 그로 인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나아가 바뀐 세상을 상상한다.
Q. 이런 행동의 배경에는 폭풍 같은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일 수도, 사랑 같은 숭고한 감정일 수도 있다. 어떤 감정이 더 클까?
은영: 단언컨대 사랑이다. 처음에는 일을 하면서 내가 마주하고 경험한 것을 누구에게든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애쓰는 대신 당연한 가능성을 더 자주 떠올린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느끼면서 산다는 것을 확신하고, 그 감정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기대한다.
Q. 그 사랑은 동물에 대한 사랑일까?
은영: 세상에 대한 사랑인 것 같다. 동물 현실을 알기 전에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나 노동 운동 활동을 하려 했다. 그땐 저항심이 컸다. 이 세상에 동의하지 않고, 어떤 부분은 저주스럽고, 내가 기댈 곳은 없고, 믿을 곳도 없고… 그래서 싸우려고 했다.
동물권 운동을 시작하면서 나는 변했다. 새벽이를 볼 때마다 존재로서 함께하고 싶어진다. 나 말고도 새벽이랑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 세상은 가능성이 있고,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깨닫게 된다. 다들 아직 몰라서 그렇지, 우리 모두는 세상을 사랑하는 존재들이다.